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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後三國時代, 892년~936년)는 892년 견훤(후백제)이 광주를 점령하고 왕을 칭한 때부터 936년 고려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2세기는 골품제를 기반으로 하는 신라 고대 국가가 붕괴되고, 그 속에서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이 나타나 고려를 세웠으며, 그 고려가 점차 봉건적인 귀족 국가로 확립되는 시기였다. 동시에 중국에서도 당(唐)이 망하고 5대(五代)라는 혼란기가 송에 의해 수습·통일되면서 한 문화가 복구되어 가는 시기이며, 한편으로는 북방 민족의 재등장이 촉진되고 있어 그 세력이 커다란 압력으로 남방에 미치던 때였다. 다시 말하면 성당 문화(盛唐文化)가 밀려들어 통일 신라의 문화가 극성기에 달했던 8세기를 끝으로, 신라는 당의 쇠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폐쇄적인 지배 체제의 모순이 격화되어 드디어 붕괴되었으며, 후삼국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10세기에 이르러 고려 왕조로 재정비되어 갔던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의 간섭이 없는 독자적인 ‘좌절과 흥기’의 반복으로써 고대 국가가 붕괴되는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때였으며, 외부 도전과 압력에서가 아니라 내부적인 승화 과정이 촉진되었던 시기였다.

7세기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무열왕의 전체적인 왕권과 성당 문화의 흡수로써 8세기에 고대 국가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부족적 전통이 강했던 신라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때에 일련의 관제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귀족 세력을 억제하려 했으나 이에 실패하였고, 8세기말 혜공왕 때에는 원래대로 환원됨으로써 전제 왕권의 한계성이 나타났다.

9세기의 소위 하대 귀족 연립 사회의 모순은 곧 고대 국가의 붕괴 원인이 된 것으로서 골품 제도의 붕괴에서 그 최초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내물왕계와 무열왕계 간의 단순한 왕권 쟁탈전이 아니라 골품이 분화되어 친족, 나아가서는 가의 분립에 따른 분열 항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같은 왕족에서도 도태·갈등이 촉진되어 혈통 위주가 아닌 실력 본위로 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골품제에 대해 예민한 반발을 한 계열은 물론 6두품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무열왕계인 무염이나 김유신계인 김암 등 강등된 계열과 최치원·최신지 등 중앙의 6두품 계열 등이 대표적이어서 이들이 골품제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하여 정신적·학문적 반사회성을 띠는 경우가 있었고, 또 일부는 실력으로 지방 세력과 결탁하여 중앙에 도전함으로써 이들 창조적인 소수 세력이 지도력을 상실한 사회에 파탄과 균열을 강요하고 있었다.

둘째 양상은 지방 세력의 대두이다. 중앙 귀족의 분열 항쟁과 골품제의 해이는 자연히 중앙 통제력의 약화로 나타났기 때문에 지방 세력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그 중에서 서해안을 통해 당과의 교역에서 경제적인 배경을 지니게 된 해상 세력과 각처에서 성주(城主)·장군·왕을 칭하고 자립한 호족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각기 커다란 경제력·토지·사병을 거느린 지방 세력으로 각지의 인민과 토지를 지배하고 조세와 부역을 징발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 도전하여 무질서와 혼탁의 시대상을 연출했다. 이들은 이중적인 착취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농민을 이끌고 반란과 항쟁을 지도하였으니, 장보고·궁예·견훤·왕건 등이 이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농민들은 초적·군도로서 이들에게 이끌렸다. 따라서 변방을 지키던 군진 세력 역시 관병(官兵)으로서가 아니라 사병으로서 해상 세력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이들이 지방 세력의 군사적인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양상은 사상의 변화였다. 신라 왕실의 종교는 불교, 특히 교종(敎宗:5敎)이었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골품제의 붕괴와 사회 혼란의 가중은 복잡한 교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학구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관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힘으로써 요행과 현세의 정신적 위안을 바라게 되었다. 따라서 풍수도참사상이나 미륵불사상이 도입되었으며, 또한 이때를 대표하는 선종이 유행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라 하여 좌선에 의해 미래상을 현세적으로 심화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교파의 대두는 정치적·사회적 혼탁기와 일치되는 바 크다. 특히 선종의 유입과 동시에 종래의 유학과 풍수도참사상 및 도교 등이 종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이때의 정신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서 일련의 사상적인 복합화가 다름 아닌 6두품 계열과 호족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사실이 고대 국가의 정신적 탈피 현상이라 하겠다.

후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궁예와 견훤은 각기 왕족 출신, 신라 무장 출신이었으나, 전자는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파괴와 부정의 괴수에 불과하였으며, 후자는 신라 관리로서의 권능과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신라 사회의 계승자를 자칭하였으므로 골품 사회를 넘어서려는 당대에서는 광범한 사회적 호응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호족 출신인 왕건은 우선 시대성을 파악하여 호족과 당대 선가·숙위 학생들의 이념을 고대적 신라 사회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들과 공존하여 탈피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대적 잔재의 완전 극복이 불가능했던 제한성 때문에 고려 사회에서는 골품제 대신 가문과 혈통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고려 귀족 사회의 성립 과정은 첫째, 광범한 호족의 결속과 유대 속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각처의 호족과 그 후 왕실 내의 근친혼의 성행, 그리고 그들을 중앙 귀족으로 흡수하는 데는 커다란 노력이 요구되었다.

둘째, 나말의 선종과 풍수도참사상뿐 아니라 유교가 치국지본으로 채택되었고, 새로운 귀족 사회의 정치이념의 발달에 따라 과거제의 실시로 중앙 귀족적 관료 체제로의 전기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나아가서 10세기말 성종 때의 중앙 및 지방제도의 정비는 관료의 지위를 결정하는 고려 귀족국가 형성의 마지막 기틀을 이룩한 것이다.

셋째, 전시과의 지급이다. 이것은 귀족 관료제 형성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것으로서, 태조 때의 역분전이 호족들의 회유와 결속을 위한 조치였다면, 경종때의 전시과는 관료제와 조화를 이루는 제도적 발전이었으며, 목종문종 때의 전시과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을 보아 고려 귀족사회는 그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역사

지방 성주(城主) 및 호족의 대두는 신라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약화시켰으며, 수취체제도 점점 해이해져 갔다. 더구나 신라 말기 귀족의 사치 향락은 늘어갔고, 따라서 비용도 증가했지만, 충족시킬 만한 재원(財源)은 반대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지방의 주·군에 조세를 독촉하게 되니(889년), 농민들은 결국 이중 부담을 강요받게 되었다.

신라의 성시(盛時)로부터 무거운 조세와 역역(力役)을 부담하고 있던 농민은 유민(流民) 혹은 도적이 되어 질서를 교란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질서는 금성(金城, 경주)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구질서에 대한 타격을 뜻한다. 조세의 독촉은 영세한 농민층을 자극하여 농민반란(農民叛亂)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리하여 진성여왕 3년(889년)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을 위시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죽주(竹州, 죽산)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 완산(完山, 전주)의 견훤(甄萱), 양길 부하 궁예(弓裔) 등이 두드러진 반란군의 두목이었다. 그밖에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赤袴賊)이란 반란군과 초적(草賊)이라고 하는 이름 없는 농민 반란군이 수없이 일어났다.

이들 중 견훤과 궁예는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새로운 정권을 수립, 건국하여 신라와 정립(鼎立)하게 되었다. 이를 후삼국(後三國)이라 한다.

그리하여 견훤은 완산주(完山州, 全州)를 근거로 삼아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구호 아래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왕위 계승 문제로 아들 신검(神劍)에게 유폐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궁예는 효공왕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더니 다시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국도를 송악에서 철원(鐵圓)으로 옮겨 9관등을 설정했다.

궁예의 뒤를 이어 북방의 왕조로 추대된 것은 왕건(王建)이었다. 왕건은 즉위와 함께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송악에 천도하니, 이것이 뒷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다.

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의 균형은 고창(古昌, 안동)에서의 전투를 계기로 고려 측의 승리로 기울게 되었다. 고려는 이에 그 전선을 후퇴한 후백제를 정면에서 위협하였다.

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무장(武將)이며, 동시에 정치가요 외교가인 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936년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援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회유하였다. 또한 통일 후 호족들과 통혼(通婚)하여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과 타협 또는 연합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고 특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에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도 이러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조 왕건은 북진책을 펴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경계하였으며,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西京, 평양) 개척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장군 유금필(庾黔弼)로 하여금 동북 지방을 수복케 하여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다.

연표

  • 892년 : 견훤의 반란, 광주 점령. 궁예, 양길의 반군에 가담하다.
  • 900년 : 후백제가 공식적으로 건국
  • 901년 :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다. 5년 후 다시 마진으로 국호를 바꾸고 강원도 철원군으로 수도를 옮겼다.
  • 911년 : 마진이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다.
  • 918년 : 왕건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를 세운 후, 연호를 천수라고 한다.
  • 926년 : 거란이 발해를 침략. 발해 태자 대광현이 부하 30여 명을 데리고 고려 고려 태조에게 귀순.
  • 928년 : 견훤이 신라를 침공해 경주을 함락시킨다. 신라 경애왕을 견훤이 사살한다.
  • 930년 : 고창 전투 - 왕건이 견훤에게 신라 경애왕을 죽인 것을 비난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 934년 : 홍성 전투 - 후백제의 국력을 손상시킨다.
  • 935년 : 견훤이 금강(후백제)을 후계자로 선정한다.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다.
  • 936년 3월 : 견훤이 아내 고비녀와 박영규를 데리고 고려로 망명한다.
  • 936년 8월 : 견훤과 왕건이 공동으로 지휘했던 황산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킨다. 쿠데타의 주범인 능환과 양검을 처벌하고, 드디어 후삼국 통일을 이룬다.

ㅡ후백제(後百濟, 892년~936년)는 892년(신라 진성여왕 6년)에 백제의 부흥 운동을 시작으로 견훤이 완산주(오늘날의 전주시)를 도읍으로 삼아 세운 나라이다. 공식적인 국호는 백제이며 후(後)는 후대의 역사에서 삼국시대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후고구려, 하대(下代)의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 중에 하나였다. 천수(天授) 19년(서기 936년) 고려태조 왕건의 대규모 공격으로 인해 패망했다.

ㅡ(후고구려)태봉(泰封, 901년~918년)은 신라 말기에 고구려 부흥 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후삼국 시대의 나라로 궁예901년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삼아 건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하였다. 905년 수도를 철원(鐵原)으로 옮겼으며,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변경하였다. 918년 왕건을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으로 멸망하고 고려가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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