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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2차 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조선반도(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했다. 그후 북에서는 조선 공산당신민당을, 남에서는 조선 공산당, 신민당, 인민당 세 개의 좌파정당이 연합하여 각각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을 만든다. 1945년 10월 북조선에서는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국유화한 다음, 농민에게 경작권을 배분하는 그러니까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급진적 토지개혁을 시행하였다.[6] 물론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무상분배된 땅은 1948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나라의 소유가 되었다. 그 뒤 북조선에서는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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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정부 수립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이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9월 9일 공산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김일성수상에 취임했다.

★한국 전쟁과 남북 대치

 

1950년 6월 25일 북조선의 남침에 의해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북조선은 6월 28일서울을 점령하고, 7월 20일에는 대전까지도 내려왔지만 UN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개입, 회원국들이 파병함으로써, 북조선의 적화통일정책이 물거품이 되었다. UN대한민국과 함께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데 이어 9월 27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남한 땅을 모두 찾음으로써 북조선은 남한 땅에서는 사실상 전쟁에서 패한 거와 다름없었다. 이어, UN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조선으로 들어오기 전에 북조선은 10월에 평양에서 철수하고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전쟁에 개입을 요청했다. 결국,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불법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한국 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으로 일단 막을 내렸으나, 비무장지대를 경계로 대치하며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북조선의 남침에 대한 이견 : 미국의 학자인 부르스 커밍스 등은 북과 소련의 일방적인 남침이 아닌, 남침 유도설 또는 남과 미국의 북침기도에 의한 반격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국전쟁:한반도(조선 반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련의 군정, 남쪽에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1948년 각각 남한북한을 건설함과 동시에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쪽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남쪽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북쪽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국의 통치자인 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모택동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고, 김일성이 그후 수 차례 그를 설득하여, 결국 중공이 전쟁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일당 독재, 반대파(애국자, 종교인, 기업가를 포함한 상당수의 북한 인민)의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북한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던 김일성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미국에서 입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남한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과,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지식인 독립운동가들은 서로 간 불신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50년 5월 코민포름이 일본공산당의 온건노선을 비판하자, 일본공산당 도구사 서기장은 노동절을 기하여 일본공산당은 1950년 테제인 다가오는 혁명에 있어서 일본공산당의 기본임무를 채택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전투적 공산당으로 변모하였다. 일본공산당은 5월 30일 궁성앞 인민광장에서 2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한 "공산당 방위, 평화옹호, 요구관철, 조선통일전선 인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 조총련의 행동대, 학생, 조직노조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집회 후 도심지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여 미군 헌병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그 예로 1949년 6월 7일에는 남한군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 북쪽으로 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지를 점령하기도 하였고, 같은해 6월 17일에는 38선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태탄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하였었는데, 이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까지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이 전투남한이 더 적극적이 였으나, 이후에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북측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강원도양양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대한민국(이하 남한)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전쟁(六二五戰爭)[, 주로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사변(六二五事變),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전쟁(일본어: 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 항미원조전쟁(중국어 정체: 抗美援朝戰爭), 코리아 전쟁(Korean War, 서구권)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일성의 권력강화

북조선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계열,갑산파계열,소련파계열,연안파계열등 연립내각 체제였다.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남로당 간부들은 대거 숙청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종파사건)를 하였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엇다. 197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공포하였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다.

김정일 정권

1980년대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0년대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되어갔다. 1991년에는 대한민국UN에 동시에 가입했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여 김정일(金正日)이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에 반대하는 황장엽등이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시도하다가 실패했으며 대부분 숙청되었지만[출처 필요] 황장엽과 김덕홍은 한국으로 망명했다. 1998년 헌법 개정을 한번 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정일의 유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으나, 그 이면으로 2002년 제2연평해전. 2006년 7월에는 미사일 시험발사를, 그리고 10월 13일에는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최근의 동향

2008년 9월 9일 정권 60주년 수립 기념식에 김정일이 나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와병설이 확산되었다. 상당 기간 동안 김정일 와병설이 지속되자 북조선 당국은 내부단속을 강화하였다.[7]

2008년 10월 11일미국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북조선을 테러 지원국에서 해제했다. [8] 그러나, 6자회담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폐막하면서, 미국은 언제든지 북조선을 다시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9] [10]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가 당선되자, 일각에서는 미국과 북조선의 관계에서 화해의 물결이 일고 있다고 보았으나[11] 2009년 4월 5일 이른바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UN 안보리 결의 1718호 위배로 보았으며, 게다가 또한 5월 25일에는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이에 UN 안전보장이사회는 같은 해 6월에 15개 이사국의 만장일치로 UN 안보리 결의 1874호를 결의하였다.


 

북조선의 정치체제는 주체사상과 '독재주의'에 근거하는 일인 일당 체제이다. 스스로는 '공산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한 예로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는 점은 공산주의의 국제성과 자체모순된다. 사실상 권력을 부계로 세습하는 상황이어서 북조선이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김씨 왕조', '공산왕조', '봉건주의' 왕국이라고 비난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이 소멸하도록 되어 있는데, 북조선에서는 계급이 소멸되기는커녕 오히려 지배계급이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김정일이 조선로동당(조선 노동당,노동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조선로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로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이 지배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선군정치 사상이 추가되었다. 또한 국가 최고 지도자는 실질적으로는 국방위원장이며, 형식적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영남(金永南)이다.

대외 관계

북조선은 전통적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구 소련, 중국, 동독 등의 구 공산국가들, 베트남, 쿠바 등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중앙유럽과 아시아의 베트남, 중국, 라오스 등의 공산주의 정권들이 민주화운동(자본주의)과 시민 혁명, 시장체제 등을 열어 사회주의가 붕괴됨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북조선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그러나 같은 반미(反美) 국가인 쿠바, 시리아, 미얀마와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파키스탄, 이란, 리비아와는 핵무기 개발에 협력하는 등 군사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리비아2003년에 핵무기를 폐기한다고 발표). 북조선은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정치, 경제 면에서도 유일한 공산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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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 대한 민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줄여서 임정(臨政)은
1919년 9월 11일 일본의 침략후 수립한 한반도 강제점령을 부인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하고 항일투쟁을 지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지에 설립된 한국의 임시정부들이 통합하여 발족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3도 대표회의로서 결성된 한성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러시아령에 소재한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 등과 통합하여 1919년 9월 대한민국 단일 임시정부로 출범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민국의 부활임을 강조하였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도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안창호, 이승만, 여운형, 여운홍, 김구, 김규식, 이동휘, 이동녕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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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정부 수립



 

개요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다. 이 안이 국내에 전해지자, 임정을 중심으로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어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신탁운동을 둘러싸고 임시정부측은 결사적으로 반탁을 주장한 반면, 박헌영조선공산당등 좌익측은 찬탁을 주장하여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고, 이리하여 좌우의 제휴에 의한 민족통일공작은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46년 1월, 미·소 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열렸고, 이어 3월에는 정식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거듭되는 동안 차츰 결렬 상태에 빠졌고, 이 혼돈 속에서 타개를 위한 몇 가지 방도가 모색되었던 것이다.

첫째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호응하여 조직한 민족통일 총본부의 자율정부운동이었다. 얄타 회담과 모스크바 3상 결의를 취소하여 38선과 신탁통치를 없애고 즉시 독립 과도정부를 수립하라는 것인 정읍발언이었다.

한편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계통의 한독당은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반탁운동을 근본으로 하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규식·여운형등 중간우파와 중간좌파가 주도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들 좌우합작운동 주도세력들인 중도파 인사들은 찬탁의 입장에서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주장하였다.

동시에 좌익세력들은 남한의 정치·경제·사회를 교란하는 여러 수단을 사용하였다. 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부산의 철도 파업을 계기로 일으킨 대구 폭동은 그들의 지하운동의 대표적인 예였다. 이 사건 이후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하였고, 1947년 6월에는 미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칭하였다.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역시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양측의 입장만 확인한상태로 완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한반도의 문제를 유엔에 제출하여 이관하였다.

미국한국에서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할 것이며, 이러한 절차를 잠시 협의하기 위해 유엔 한국 부흥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 결의안의 수정 통과로 유엔 한국위원단은 1948년 1월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의 활동은 좌절되었다. 1948년 2월의 유엔 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 내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가결하였다. 이와같이 하여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5월 31일에는 최초의 국회가 열렸다. 이 제헌국회는 7월 7일에 헌법을 공포하였는데,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으며, 그해 12월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아 대한민국은 한국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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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혹되지말자 2010.05.23 02:41
    얼마나큰지 대자를 붙히는지 지도 보면 딱 알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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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ed 2011.10.10 16:21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대한민국"
    력사사건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
    진달래2014 2013.02.23 13:29
    작은 나라니까 대자 붙이지 큰나라면 안붙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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