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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010.01.01 10:20

38선과 한국 전쟁(항미원조전쟁)

조회 수 18519 추천 수 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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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미원조전쟁 상황도

북위 38도선과 한국 분할

ㅡ미국 전쟁성 작전국의 안

미국 전쟁성 작전국(OPD)의 요원들은 1945년 7월 한반도를 연합국이 분할 점령하는 계획안을 마련했다. 이때 소련은 원산 이남을 제외한 함경남북도를, 영국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미국은 원산 이남의 함경남도 일부와 강원도, 경기도, 충청북도, 경상남북도를, 중국은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점령하도록 계획했다.

ㅡ미국 합동전쟁기획위원회의 초안

전쟁성 작전국의 안을 수정하여 합동전쟁기획위원회(JWPC)는 한반도 서해안의 신의주, 곧 북위 40도 10분으로부터 동쪽으로 그어 함흥을 연결하는 분할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들어 채택하지 않았다.

ㅡ미국 합동전쟁기획위원회의 수정안

합동전쟁기획위원회에서는 초안을 고쳐 수정안을 내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소련은 나진, 청진, 원산에 주둔하고, 중국은 평양 일대에, 미국은 인천과 부산에, 영국은 군산에 주둔하게 되며, 서울에는 소련과 미군이 함께 주둔한다.

ㅡ미국 전쟁성 작전국의 수정안

서해 북위 38도 10분에서 동해안 북위 37도 40분을 잇는 사선 형태의 분할안을 내놓았다. 이는 서해안과 서해 5도, 해주와 개성을 확보함이 긴요하다고 판단했으리라 여겨진다.

ㅡ3성 조정 위원회의 최종안

전시에 미국이 전쟁 수행에 관한 의견과 정보를 신속히 교화하고 전쟁 수행 방향을 최종 결정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국무성, 전쟁성, 해군성의 요원이 모여 만든 3성 조정 위원회(SWNCC)에서 내놓은 북위 38도선안이다. 이 안건을 내놓은 사람은 전쟁성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딘 러스크 중령이었다. 러스크 중령은 전쟁성 대표 조지 링컨 소장에게 보고하였고, 이는 ‘일반 명령 제1호’로 확정되어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이때 러스크 중령은 지도를 보니 38도선이 눈에 띄어 그 선을 분단선으로 삼았다고 위증했다. 오늘날 러스크가 선을 그은 지도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10도 단위로 위선이 그어져 있어 38도선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최종안에 대해 미국은 소련이 이를 선선히 응낙한 데 놀랐고, 소련은 위도가 그토록 후하게 남쪽으로 내려간 데 놀랐다. 당시 소련은 북위 40도만 확보해도 좋다고 여겼다고 한다.

○휴전선으로 대체

6.25전쟁 이후인 1953년에 책정된 양측의 군사분계선(휴전선)은 비무장지대의 중간에 세워졌으며, 38도선과 비슷한 위치에 있지만 실제로는 왼쪽 끝이 오른쪽보다 아래에 있다. 따라서, 38도선 이남의 옹진(甕津), 연백(延白), 개성, 개풍 지역은 북측에, 38도선 이북의 철원, 연천, 양구, 인제, 양양, 고성 지역은 남측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38도선이 한국의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휴전선을 38도선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행정 구역 상으로는 주 정부 경계에 준하지만 사건 발생 빈도는 경찰 통제선(police line)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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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항미원조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조선 인민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김일성의 남침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구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에 의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6년 7월 한국 전쟁의 기록을 북침에서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8]

결국 구 소련문서의 공개에 따라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덜레스 장관이 남한을 방문하는 사건 등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교적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북한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북한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사회학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한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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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에 전시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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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맨36 2010.01.01 18:11
    막판에 중국군에 개입이 없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구소련)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럴경우 대한민국의 공산화 위협에,중국과 구소련에 무력위협에 시달려질도.중국과 구소련과의 국경에 맞닿은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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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ed 2011.10.04 22:12
    38선과 한국전쟁 자료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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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선 2013.10.07 01:09
    625전쟁에서 조선의용군 용사듵이 불쌍합니다 이분들은 중국혁명에도 혁혁한 공을세운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인데요 김일성이 모택동주석한데 특별부탁하여 김일성 남침부대 최전방 조선인민군 1종대에 편입되여 최전방에서 밀고나갔는데 그용맹함은 미국병사들도 벌벌 떨었다네요 이분들 아님은 전광석화로 이틀도 안되여서울점령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결국 미군의 인천상륙전으로 대부분 희생되였죠 연변에가면 이런이야기있어요 < 산마다 진달래꽂 활짝피고 , 곳곳마다 인민영웅 기념비 촘촘히 자리잡았네.. 아마 그전쟁에 많은 여인들 전쟁에 남편잃고 꽃다운나이에 젊은과부로 눈물겨운 일생을 보내셨죠 인젠 남이든 북이든 한민족끼리 싸우는 민족망신은 없었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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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선 2013.12.15 22:39
    힝미원조란? 중국식 발음그대로 미국의 조선전쟁 참여를 반대하고 북조선을 지원하자는 625전쟁때 중국식 전투구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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