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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010.01.01 11:23

외세 침입대한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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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수,당나라의 투쟁(전쟁)

6∼7세기 초의 정세를 보면, 553년 나제동맹이 깨지고 신라 진흥왕()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위() ·진() ·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후에는 )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고구려 영양왕(嬰)은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서진정책(西)을 단행, 요서(西)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충돌하였다.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는 수륙군() 30만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반격과 질병 ·풍랑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수나라 양제()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대군으로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제()는 다시 약 30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으나,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이었다.

이로써 수나라는 618년 내란이 일어나서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립하고 돌궐 등과는 내왕하였기 때문에 당나라 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다롄[]과 부여성(눙안)을 연결하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당나라에 대한 태도가 더욱 강경하였고, 당나라와 연결한 신라를 백제와 더불어 자주 공격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西)을 평정하였으며,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이적(:) ·장량()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약 60일 사투()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 ·3차(647년 ·648년)에 걸쳐 이적 ·우진달() ·설만철() 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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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상황도


나당전쟁 [] 신라-당나라 전쟁
ㅡ670~676년에 진행된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
당나라
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지역에는 9개 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또한 663년(문무왕 3)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여 형식적이나마 신라를 당의 한 도독주로 삼았다. 특히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삼국을 총괄토록 함으로써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삼국을 통합한 직후부터 당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먼저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하여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금마저(:익산군 금마면)에 도읍을 정해줌으로써 고구려 부흥군과 유민들을 대당()항쟁에 이용하였다. 670년에 신라군이 당나라와 부여 융(:웅진도독)의 백제군대가 머무른 82개 성을 공격하였고, 671년에는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러나 이후 당군의 침략이 격화되어, 672년 당나라 고간()의 대군과 격돌하였다. 또한 당나라는 674년 신라 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그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하고서 다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신라는 675년 당나라 설인귀()의 침공을 격파하여 1,400명을 죽이고, 이근행()이 이끈 20만 대군을 매소성(:양주 일대)에서 크게 격멸하였으며, 676년에는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패퇴시켰다.

결국 신라군에게 대패한 당이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김으로써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고려와 거란(요나라)와의 전쟁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遼)를 건국하였다. 922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의 태조는 거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북진 정책을 실행하였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광군(光軍) 30만명을 양성하여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발해 유민이 압록강가에 세운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 진화(振化), 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성종 12년) 10월 요나라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朴良柔)와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함께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등의 주장이 난무하였고,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였으나, 서희와 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주장하였으므로 성종(成宗)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를 급파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였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는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이 때문에 대국[여기서는 자신의 국가인 거란을 말한다.]이 와서 치는 것이다. 지금 땅을 떼어 우리에게 바치고 사신을 보내 조빙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던 것이다. 만약 다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여기서는 거란을 말한다.]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이다.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하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은 우리나라 땅이지만 여진이 점거하였다. 이들이 교활하고 변덕이 많아 길을 막아서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조빙을 못하게 됨은 여진 탓이다.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 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하여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으며 강제 출가한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의 실제적인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여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재차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姜邯贊)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회군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고려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귀주대첩

이 부분의 본문은 귀주 대첩입니다.

강감찬은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전쟁 결과

1019년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으며, 이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을 하지 않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요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한편 고려도 서북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하기도 힘들어졌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쌓는다.

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고려 ㅡ 몽골(원나라)전쟁

고려-몽골 전쟁고려몽골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다만 한국의 입장에서 원의 침략, 몽골의 입구(入寇), 대몽항쟁 등으로 부르며, 특히 대몽항쟁으로 부를 때에는 고려-몽골 전쟁을 비롯하여 삼별초의 항쟁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고려 고종최씨의 무단정치(武斷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라는 영웅이 나와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몽골은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이를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다(→강동성 전투).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제1차 전쟁

칭기즈칸의 대를 이은 오고타이(태종)는 1231년(고종 18) 장군 살리타이(撒禮塔)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침입에 착수하여,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이를 맞아 구주(귀주)·자주(慈州)·서경 등에서 크게 무찔렀으나 대체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드디어 몽골 군사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 侹)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그 결과 싸움은 일단 중지되고 몽골은 이듬해인 1232년 음력 1월 군대를 철수하였는데 몽골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명을 두었다고 전하나 《고려사》에는 전혀 이런 기록이 없다.

제2차 전쟁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이는 고려의 본의가 아니었고 또 앞으로 몽골의 태도 여하를 몰라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江華遷都)를 결정하고,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 :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굳게 하였다. 이는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이는 7개월 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서경의 홍복원(洪福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南京 : 한양)을 공격한 다음 한강을 넘어 남쪽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해전(海戰)에 약한 몽골은 강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 : 용인)을 공격하다가 살리타이는 고려의 김윤후(金允候)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불타 없어졌다. 한편 몽골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우는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앞서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고, 가족을 사로잡고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제3차 전쟁

1235년(고종 22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당을태(唐兀台)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몽골은 개주(介州 : 개천)·온수(溫水 : 온양)·죽주(竹州 : 죽산)·대흥(大興 : 예산)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 유명한 황룡사 9층탑(皇龍寺九層塔)도 이때에 파괴되었다.

이같이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도만은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강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도에서는 백성에게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여 1238년(고종 25년) 겨울 김보정(金寶鼎) 등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제(王弟 : 왕의 아우)라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내고 1241년(고종 28년)에는 신안공의 종형(從兄 : 사촌형) 영녕공 준(永寧公 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제4차 전쟁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구유크 칸(貴由 :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출륙(出陸 : 강화도에서 나옴)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몽골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한때 철군하였으나,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1년(고종 38년) 예케(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주(東州 : 철원)·춘주(春州 : 춘천)·양근(楊根 : 양주)·양주(襄州 :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제5차 전쟁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고,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그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과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제6차 전쟁

이듬해 몽골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하여,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제7차 전쟁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결과

이처럼 7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고려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막대한 인명·재산·문화재의 피해를 입힌 채 몽골은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몽골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1259년(고종 46년) 음력 3월 박희실(朴希實)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도의 성을 헐게 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 끝에 드디어 고려는 굴복하였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그는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 강도에서는 무신간의 알력이 생겨 한때 왕이 폐위되었으나 다시 복위하였고, 몽골의 초청을 받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하여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완전히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는 강화에 천도한 지 39년 만의 일이다.

ㅡ영향

고려는 강화도의 작은 섬을 안전지대로 삼아 근 40년간 질풍 같은 몽골의 대군을 맞아 항전하는 동안 상하 모든 사람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극히 왕성하였는데,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 무사들의 항거정신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부처의 힘을 빌고자 15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사실은 한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문화의 형성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 각지는 적의 침략을 당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족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화재는 소실되고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간섭을 받아 충렬왕 이후 공민왕까지는 부마국(鮒馬國 : 사위나라)으로 변질되어 자주성을 잃은 왕조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기구와 그 명칭은 제국이 아닌 왕국으로써의 관제로 개편당했고, 동·서북면에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동녕부(東寧府) 등이 설치되어 국토의 손실을 가져왔다. 한편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왕실의 내부·심왕당(瀋王黨)의 대두 등은 고려 쇠퇴의 중요한 원인을 만들었다. 문화적으로도 몽골 지배하의 80여 년간은 문물교환·인물교환이 잦아 이른바 몽골풍의 유행을 보게 하여 고려인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동서 문화의 교류에 힘쓴 몽골의 영향을 받아 천문·의학·수학·역법(曆法)·예술·목화·화약·정주학(程朱學) 등이 전래되어 고려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상류층 사회에서도 고려양(高麗樣)이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ㅡ일본 전쟁(임진왜란)

ㅡ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祿]의 역(),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좌기관()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를 중지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일본국왕사(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의 서사()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 조헌()은 만언소()를 올려 시폐()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을 정사(使), 김성일()을 부사(使), 허성()을 종사관()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晬) ·이광() ·윤선각()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 ·이일()에게는 변비()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西]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使)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使)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도도 다카토라[]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로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동로(), 제2군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제3군 우로()는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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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의병장(장군)활동과 일본군의 진격,상황도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岉)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使), 김근(玏)을 좌도안집사(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使) 유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使)였던 김명원()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유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둥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싸움·행주산성()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과 김해성()의 저항, 경상우방어사(使) 조경()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에서의 밀양부사 박진()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길주()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유정()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調]·겐소[]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을 허락한다는 봉공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貿)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공산(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함락하고 서생포(西)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순천()·김해()·창원()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초계()·거창()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에서 상주목사 정기룡()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죄명으로 하옥되고 원균()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 진린()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은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은 화차()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의 실시, 면세전() 확대의 방지, 균역법()의 시행, 기민()을 위한 환곡()·모곡()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제도, 공명첩()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등 세폐()와 정병()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마부태()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병자호란 [](조선ㅡ 청나라 전쟁)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으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원손()·봉림대군(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격문()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 등 주화파()와 김상헌() 등 주전파()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의 예()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册)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중국황제의 생일)·정조()·동지()·천추(: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 등의 사절(使)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과 혼연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할 것, ⑧ 성()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1639)부터 일정한 세폐()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에 따라 소현세자·빈궁()·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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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 조약(한일합방조약)에 반대 투쟁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때문에 조약 체결의 사실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일본에 대한 항쟁이 일어났다.

장지연(, 1864~1920)은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일본의 흉계를 비판하며 조약 체결의 사실과 부당함을 널리 알렸다. 의정부참찬() 이상설(), 종1품 이유승(), 법부주사() 안병찬(), 원임의정대신() 조병세(), 시종무관장() 민영환(), 전참찬() 최익현(), 특진관() 이근명(), 종묘제조(調) 윤태흥(), 승지() 이석종(), 유림() 이건석() 등은 상소()로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상소가 효과를 얻지 못하자, 민영환은 유서를 남겨 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대() 일등병() 김봉학(), 주영공사(使) 이한응() 등도 죽음으로 일본에 항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도 일어나 전참판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이,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유인석() 등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나철(), 오기호() 등은 이완용, 박제순 등의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거사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ㅡ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의병군이 참패를 면하지 못한 곳도 있었지만 승리하는 전과도 있었다.

고종()도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등을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려 하였다. 1907년에는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 등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헤이그로 밀사(使)로 파견해 열강()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하였다. 하지만 한국 대표의 회의 참석은 거부되었고, 밀사(使) 파견이 문제가 되어 고종()은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되었다.

을사조약은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에서 무효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906년 프랑스 파리법과대학의 교수인 F. 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 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 체결에 대한 비준서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1965년 체결된 ‘대한민국일본국과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협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제2조)고 규정하여 을사조약이 다른 조약과 함께 이미 무효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한일협정 제2조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나 을사조약의 효력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무효였다고 보지만, 일본에서는 1965년 협정 이후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한국은 국제 관습법()에서 강제와 위협에 기초한 조약 체결은 무효로 하므로 을사조약도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본다. 당시 국가를 대표했던 고종()의 승인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고종이 친서()와 밀사(使) 등으로 국제 사회에 조약이 무효임을 꾸준히 밝혔다는 사실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일본은 강제와 위협에 기초한 조약 체결을 무효로 하는 국제 관습법은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났으며, 1945년 ‘국제연합헌장’에서야 비로소 명문화되었으므로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고종()에 대해 강제와 협박이 행해졌다는 역사적 근거도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을사조약의 실효성을 둘러싼 대립은 간도협약() 등 1905년 이후 일본이 한국을 대리해 청() 등과 체결한 조약의 효력과도 연관되므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광복군 []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1932년 이후 임시정부()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재정상 운영의 내용도 부실하였다. 더욱이 1937년 중 ·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단체들은 충칭에 이전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군사활동과 외교활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의하여 광복군이 조직되었는데, 광복군의 편성문제는 치장[綦]에 있을 때부터 추진되어 오던 일로서, 군사특파단()을 시안[西]에 파견하는 한편, 광복군은 많은 경비가 필요한 군사조직이므로, 중국정부의 양해를 얻는 교섭을 벌였다.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광복군의 조직을 찬성하였지만, 한편으로 임시정부와 분열 상태에 있는 김원봉()계의 조선의용대()와 이미 합동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성립전례()를 가지고 우선적으로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발족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과 그 밖의 선전 전단()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으며, 총사령에는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이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편성은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군사법규인 육군임시군제() ·육군임시군구제()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 ·군사경위근무조례() ·경위근무세칙() ·군무부임시편집위원부규정() 등 군사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규정에 따랐다. 광복군은 3개의 지대()로 편성되었는데, 제1지대장에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가 취임하였다. 또, 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되어 나월환()이 통솔하였는데, 제5지대는 원래 전지() 공작원들이 많아 편성 후에도 주로 전후방 공작업무를 수행하였다.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등의 6단()으로 기본적인 편성이 되었다. 또한 《광복()》이라는 간행물을 발행하는 한편,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살포하여 애국 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청년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썼다.

1941년 11월에는 중국정부 군사위원회에서 광복군은 항일작전 기간 중에는 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속되어야 한다는 등 9개 항()의 조건을 내세워 지원을 제의해 왔으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1941년 12윌 1일 수락선언문을 발표하여 군수물자의 충당은 일단 해결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을 정식으로 포고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분열상태에 있던 공산진영()과의 합류가 추진되어 1942년 7월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광복군은 1944년 8월에 임시정부로 이관되어 임시정부 통수부()가 통할하게 되었다. 광복 직전에는 한미합동작전으로 국내 정진대()를 편성하여 진격하려다가 출동 시기가 임박하여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해방 후 일부는 귀국하였다.

청산리전투 ㅡ

3·1운동 이후 두만강압록강 접경지대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에 일제는 직접 일본군을 간도로 침공시켜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간도침략에 대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일제는 중국의 마적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훈춘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에 투입하여 한인사회와 독립군을 탄압하였다. 일본군의 강요로 독립군을 탄압할 수 밖에 없었던 중국 관헌들은 독립군단에게 근거지를 이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은 1920년 8월 하순부터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고자 본영을 떠나 허룽현[] 이도구()· 삼도구()의 서북방 삼림지대로 진군하였다. 이곳은 험준한 삼림지대로 일제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으며 국경과 근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펼 수 있었다.

간도로 침입한 일본군 중 동지대()는 10월 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에 김좌진 장군은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21일 아침 백운평으로 들어왔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기습하였고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위부대 200명이 전멸하였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타[] 연대도 독립군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독립군을 협공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퇴각하였다. 북로군정서 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북로군정서 군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갑산촌()으로 철수하였다.

이 시각에 일본군은 이도구 완루구()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하였다. 홍범도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 은 인근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어랑촌에 주둔한 아즈마[] 부대에 알렸다. 공격을 예상한 북로군정서 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북로군정서 군과 완루구에서 승리한 홍범도부대 등 약 1,500명이 총동원되었으며 승리를 거두었다.

10월 24일에는 북로군정서 소속 한 부대가 천보산 부근에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10월 25일에는 홍범도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홍범도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골짜기에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미 독립군은 공격을 대비해 매복 중이었다. 독립군은 즉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전투는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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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와 행인

ㅡ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 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쬐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 언제든지 오실 줄만을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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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응 2010.01.20 23:05
    ....많은 력사는 모르지요~~~ 다만 내가 중국력사책에서배운것은 신라놈들이 죽일놈들이란것!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치고 조상의 땅을 비굴하게 팔아넘기였다는것!
    그 신라의 위치는 지금의 경상도라는것! 부산맨님은 신라사람이라는것!
    그리고 나는 중국사람이 되였다는것!

    하여간 수고많습니다~~! 그러나 혹시 지금은 조선을(북조선을) 외롭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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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맨36 2010.05.04 21:13
    신라의 삼국 통일이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비교해서 외세를 끌여들인 점은 문제지만 백제는 나라가 기울고 있었고, 고구려 중국의 수,당나라와 물리적 충돌 관계로 통일의 주도권은 신라에게 넘어가고 있었다고 봐야 비록 외세를 끌여 들여 고구려 옛영토 상실 가졌다 준 것은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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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맨36 2010.05.05 19:12
    아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궁예에 의해서 건국된 후고구려(훗날 태조 왕건 고려)에 의해서 신라가 병합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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